역시, 오래 전 시네마천국 게시판에 올렸던 기타노 다케시에게 보내는 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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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 박혜림(수페) 조회수 : 273
등록일 : 1999-12-08 16:05:09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6536 bytes
안녕하세요?
동해바다 건너 일본땅에서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에게도 물어주지 않으시렵니까, 별일 없냐고.
네, 별일 없습니다. 정말로 無事한 날들을 살고 있어요.
바구니 속의 감자처럼, 쌀독 안의 쌀알처럼, 책꽂이 한켠의 전화번호부처럼
저는 그렇게 잘 있습니다.
12월의 첫날, 저는 <소나티네>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나오는 영화요.
당신이 만든 영화라는 사실이 어쩌면 더 큰 의미를 갖겠지만
만약 당신이 영화를 만들기만 하고 거기에 나오지는 않았다면
제가 당신께 이런 편지를 쓰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저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이와이 슈운지에게는 편지를 쓸 마음이 없습니다.
ET나 후지이 이츠키에게라면 또 모르지만 말입니다.
<소나티네>를 보는 것이 저에게는 좀 버거운 노동 같았습니다. 힘들었어요.
영화를 보긴 보았으되 한명한명의 인물들과 만나지는 못했고
사건의 맺힘과 풀림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로 뭉뚱그려진 당신 무라카와 패거리의 표정을 기억할 뿐입니다.
당신네 패거리의 그 표정 - 수당도 못 받고 주기적으로 야근하는 사람 같은,
엉덩이가 무거운 상사 때문에 별 할일도 없이 퇴근하지 못하는 사람 같은,
사무적이다 못해 격무의 희생자같은 얼굴 말입니다.
일본에도 그런 얼굴들이 많겠지요? 여기 남한 사회에도 쫙 깔렸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야쿠자니 뭐니 하는 조직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빽빽하게 꽉 짜여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소시민적 방식의 삶이 싫어서
겉돌던 목숨들 아니었나요?
락커나 예술가가 되지 못한, 아니 그것마저 되지 않은 삐딱이들 아니었나요?
그런 당신들 얼굴에 새겨진 그 표정이라니.
당신들이 그런 표정을 하고 '업무'를 추진하는 앞부분이
저에게는 상당한 고통이었습니다.
보셨습니까? 제가 극장 좌석에 몸을 좁히고 앉아 영화를 보다 말고
자꾸만 손을 들어올려 어깨를 주무르던 것을. 당연히 못 봤겠지만요.
언제인가부터 머리나 마음이 고단하면 어깨 위로 무거운 더께가 내려앉아요.
거기엔 넓은 흡판이 달려 있어서 제 어깨며 목의 밑둥을 꼭꼭 씹어들어오죠.
그러면 저는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며
속엣말로 얼러댑니다.
자, 진정하라구. 긴장 풀고, 화도 내지 마. 어깨선을 낮추고 목을 젖히면 좀
나아질 거야. 성질을 부려봤자 뾰루지만 돋고 얼굴은 점점 미워지고 말걸.
당신은 저의 이런 고통에는 아랑곳 없이 예의 그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아십니까?
당신의 표정은 당신네 패거리의 그 표정과는 또 다르다는 것을.
당신은 바닷가 집에 가기 전까지는 한번도 웃지 않더군요.
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찡그리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으며,
무표정한 표정이라고 할 만한 표정마저 짓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무라카와라는 이름으로 그 얼굴을 보여주지만
저는 <하나-비>에서 이미 그 얼굴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야쿠자 무라카와의 얼굴도, <하나-비>의 형사의 얼굴도 아닌
기타노 다케시 당신의 얼굴입니다.
아, 당신의 그 표정.
저는 그 표정을 짚어낼 만한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그것도 아닌 표정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어요.
이러하고 저러하며 그러하다라는 설명은
제가 표현하고 싶은 뜻을 점점 더 흐리게 할 뿐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말을 덜어내야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더하고 보태는 말은 흡판 달린 더께처럼 쌓여
오히려 진실을 파먹어들어간다는 사실은
참, 절망스럽습니다.
당신, 참으로 화끈하고 기똥찬 삶을 살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시간의 속도를 앞질러 달렸다지요.
사선을 넘었다가 기적처럼 간신히 살아돌아온 목숨이라는 기사를 읽었어요.
그 얼굴, 당신의 그 표정은 그때 자리를 잡은 것인가요?
아니, 당신의 모든 표정은 그때 오토바이의 속도에 다 떨려나가고
그렇게 텅 빈 얼굴만 남은 채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인가요?
당신,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요.
아, 젠장. 겨우 죽었나 했더니 다시 살아나 버렸다. 더 살아야 한단 말이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이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있지 않고 여기 저와 가까운 곳에 있다면,
스크린에서만 볼 수 있는 얼굴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동네에서, 어느 모임에서
수시로 만날 수 있는 존재라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구요.
저는 無事하지 못했을 겁니다.
학교 때 제 친구 중에
늘상 그렇게 어둡고 칙칙한 남자에게만 마음을 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애가 목소리를 낮추고 '저 사람이야' 짚어줄 때마다 제가 그랬어요.
넌 어디서 저렇게 컴컴한 남자들만 찾아내는지 신기하다고. 정말 눈도 밝다고.
전 그때 그 애가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런 남자들에게만 마음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더랬어요.
그런데 이제보니 제가 그 애보다 늦되면 늦됐지 빠를 건 없다 싶네요.
뭘 모르는 젊은 여자들이 흔히 그렇지요.
밝은 것보다는 어둡고 음울한 것에 끌리는 것 말입니다.
無事한 날들은 시시하기만 하고,
그것이 추락이어도 좋으니 거센 바람 속으로 휩쓸려들어가고 싶지요.
저는 짧은 머리 그 여자를 질투했어요.
제 남편의 목숨을 당신 손에 넘겨주고는
짧은 바지에 흰 면티를 입고 당신을 쪼르르 쫓아다니던 그 여자요.
표정 없는 당신 얼굴을 실컷 따라다니고
바닷가에서 벌이는 그 모든 유희에 동참하고
마침내 당신의 그 얼굴에 웃음이 생겨나는 것까지 다 지켜볼 수 있었던
그 여자의 그 無事하지 못한 한때를 빼앗고 싶었습니다.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일부러 틀어놓은 건 아니고 그냥 아무데나 주파수를 맞춰두었던 거예요.
낯설고도 친숙한, 멋진 음악이 나오길래 잠시 손을 내리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마지막 음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신지혜가 그러네요.
<소나티네> 삽입곡이라구요.
아, 이런 음악이 있었던가요.
저는 워낙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영화 볼 때 음악을 못 들어요.
음악, 음악은 시간을 견디는 마법이 되더군요.
짧은 몇 분이 영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잠시 사랑의 슬픔에 잠겼다가 고개를 드는 사이에
잠원동에서 안국역으로 공간이동을 해 있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당신,
<소나티네>에서 당신네 패거리가 바닷가로 가기 전까지는
음악을 한 곡도 들려주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요?
그 길고 지리한 고통의 시간을 뭉텅뭉텅 흘려보낼 음악이 단 한 곡도 없어서
제가 어깨 위에 생고통을 쌓아가며 견뎌야 했던 것은 아닌가요?
확인하고 싶지만 이 영화를 또 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기타노 다케시 당신이 나오는 영화라면 모조리 다 보고 싶습니다.
또 무슨 영화가 있나요?
다른 영화에서도 바다를 보여주실 건가요?
<하나-비>의 미술작품들과 <소나티네> 첫장면의 푸른 생선 같은
이미지들도 저를 무척 황홀하게 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이만, 평안하시기를.
나의 기타노 다케시 씨.
추신:
아, 그리고
소나티네를 본 날은 제게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겁니다.
저는 그날 특별한 동반자와 함께 영화를 봤으니까요.
제 옆에 앉아 있던 분, 그분은 제가 제 바구니 속으로 초대한 햇감자이자
묵은 쌀을 긴장시키는 햅쌀이며 전화번호부 옆에 방금 꽂힌 신간서적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은 有事하다면 有事한 날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제 부탁을 안 들어주시긴 했지만 :)
혹시 제 바람을 들어주셔서 적설량 5센티 가량의 함박눈이라도 내려주었다면
그날의 풍경에 몇몇 사건과 이미지가 덧붙여졌겠죠.
기타노 다케시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해주신 주향님, 정말 고마웠습니다.
제가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보내드렸던 것 같아요.
영화가 너무 고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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