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느 영화제 시상대 위에 선 자랑스러운 박찬욱 감독의 미소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있는 그 긴장되는 순간에도 존경하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사진 촬영을 했을 때의 흥분을 먼저 자랑했고, 심사위원장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그저 수다스러웠던 친구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는 그는 <올드보이>의 뛰어난 감독이기에 앞서 그저 한 명의 진지한 영화 매니아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더이상 칸느는 없었습니다. 그저 크라이테리언 회사에서 자신의 DVD 셋트를 출시해주기를 원하는, 다시 소박한 영화 매니아로 돌아온 박찬욱 감독을 만났습니다.
그가 직접 이야기하는 다음 영화, 그 다음 영화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 친절한 찬욱씨'
대종상이 열리던 날의 뜨거운 오후, 그가 새로 창립한 MOHO영화사의 시원한 사무실에서 분주하게 서성이고 있던 그를 만났습니다. 그래도 여유로운 미소로 기자를 반겨주는 박찬욱 감독, 첫 인터뷰의 긴장감은 그 친절함 앞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깐느 영화제 현지에서, 또 국내에 돌아오셔서 인터뷰 정말 많이 하셨죠?
사실 영화에는 말로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렇게 꼭 말로 규정해주어야만 하니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예술의 신비함, 그 모호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인터뷰 많이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인터뷰에서 가장 말씀을 잘 하시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어요.
성격상 그런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친절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금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어려운 시간 내서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친절한 강재씨, 친절한 금자씨가 아니라 친절한 찬욱씨라고 불러드려야 할 것 같네요.(웃음)
'깐느 영화제, 그 이후'
'깐느 영화제에서 생긴 일'에 대해서는 다른 인터뷰에서도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또 물어보면 지겨우실 것 같은데요. 그래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 대해서는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수상에서 타란티노 감독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드보이>의 수상에 있어서 타란티노 감독의 선택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나머지 심사위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타란티노 감독이 영화를 좋게 보아주셨지만, 나머지 심사위원들이 싫어하면 어떡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회의에 들어가니 다른 심사위원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국 심사위원 모두의 선택인 셈입니다.
수상 이후, 브라이언 드 팔머, 마틴 스콜세지 같은 세계적인 감독들이 <올드보이>를 빨리 보고 싶다고 DVD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혹시 보내주셨나요?
네! 보내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동경하던 거장들에게 자신의 작품이 보여진다는 것에 대해 혹시 부담감을 느끼시지는 않으신가요?
그들이 좋아해야 할텐데, 그래도 그들에게 보여지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복수 시리즈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그리고 최근 제작 계획이 발표된 <친절한 금자씨(가제)>까지 복수 시리즈 3부작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사실은 <올드보이>를 처음 제안 받았을 때, 또 복수극을 해야 하나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작 발표회장에서 기자들이 계속해서 '복수'라는 주제로 두 작품을 묶어버리기에 홧김에 복수 3부작을 기획하고 있다고 즉흥적으로 대답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이렇게 현실화되었네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복수 시리즈를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죠?
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입니다. 그런데 <친절한 금자씨>라는 제목 어때요? 내부적으로도 아니라는 의견이 있어서 지금 고민하고 있는데,
제목만으로도 중의적인 주제가 부여될 수 있고, 느낌도 좋고, 좋은 제목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밀어부쳐야지! (웃음)
‘올드보이’는 한/일 합작품
어떻게 원작만화를 처음 접하게 되셨어요?
봉준호 감독한테 처음 만화책을 추천받았고 나중에 PD에게 영화화를 제의받았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는 <올드보이> 원작에 대한 시비 논란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네티즌들이 <올드보이>는 일본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나와 한국 네티즌들과 충돌하고 있다는데?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냥 한/일 합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2002년 월드컵처럼 말이죠.
원작 만화책은 강한 질문이 부여되며 집중력을 얻는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에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원작에서는 도달해내지 못한 해답을 감독님께서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도입하면서 찾아내셨고, 결국 그것으로 작품을 완성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는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원작 만화책의 결론이 좋았습니다. 굉장히 철학적이면서도 인간의 내면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듯한 접근방식이 좋았습니다. 다만 영화로 표현되기에는 그것이 너무 모호해서 다른 해답을 찾은 것 뿐 입니다.
‘최종병기 그녀’
평소에 일본 만화책을 많이 읽으세요?
그렇게 많이 보는 것은 아닌데 정말 재미있게 본 작품들은 몇 개 있어요. <멋지다 마사루>, <보노보노>, <아즈망가 대왕>......
아! 언젠가 <멋지다 마사루>를 영화화 하고 싶었는데 원작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어서 못하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으시자나요
네. 그랬었죠. <멋지다 마사루>는 영화로 표현되기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종이에서 봐야만 하는 특유의 그 무엇인가가 있는데, 어렵죠.
<올드보이> 이후 만화 원작으로 제작 준비되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봉준호 감독도 아주 유명한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준호야 만화 워낙 좋아하니까, 그런데 비밀스러운 녀석이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일본 만화 원작으로 기획되고 있는 작품들은 <올드보이>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미녀는 괴로워>라는 만화도 영화화 되어진다고 했는데,
<미녀는 괴로워>는 타이틀롤을 맡을 주연 여배우의 캐스팅이 어려워서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재미있게 읽은 만화인데 아쉽죠.
저도 아쉽네요.
그렇다면 혹시 감독님께서 또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은 만화가 있습니까?
있어요. <최종병기 그녀>!
대단한데요. 지상에서 가장 슬픈 러브 스토리, 박찬욱 감독이 연출하신다면 정말 독특한 분위기가 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알아보니까 벌써 일본의 어떤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포기했습니다.
금자씨는 고두심? 송강호는 흡혈귀?
다음 영화는 <친절한 금자씨>죠. 감독님께서 주연 여배우를 누구를 선택할지 많은 기대와 논란이 있었습니다. 심은하씨의 복귀작으로 거론되기도 하고, 고현정씨 이름도 나오고, 결국 이영애씨로 결정하셨는데 그 선택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이 있으셨는지요?
심은하씨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고현정씨와는 술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금자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 같은데,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꼭 캐스팅을 한다는 말은 아니거든요. 이영애씨를 선택한 이유는 이전에 이영애씨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반대되는 역할이라 도전해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처음 시나리오를 구상했을 때는 따로 마음에 두고 있었던 여배우가 있긴 있었는데.......
굉장히 궁금한데요?
고두심씨 입니다. 시나리오가 구체화 되면서 연령대가 맞지 않게 되어서 생각을 접게 되었지만요.
관객들은 이영애씨의 폭력 장면이나 노출 장면들에 대해서 관심과 기대가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소식일 수도 있겠지만,(웃음) 폭력적인 장면이나 노출 장면이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영애씨는 절대 벗기지 않습니다. 원래 그런것을 싫어하는 배우이기도 하구여. 그저 연약하면서도 심리적인 형태의 복수가 진행될 뿐입니다. 물론 마지막에 무엇인가 한 방은 있습니다.
칸느 다녀와서 이영애씨를 만나신 적은 있나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에 시나리오 한 줄이라도 더 써야 하는데, 빨리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만나고 싶습니다.
그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흡혈귀 영화라고 들었는데요. 송강호씨가 주인공이고,
이런! 벌써 그것까지 소문이 났나요? 네. 흡혈귀 영화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박쥐>로 생각하고 있고, 송강호씨와 이야기가 된 상태입니다. 흡혈귀의 일종의 죄의식에 대한 영화입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짙고 신과 악마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제 영화 중에서 가장 무거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그 무거움을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까요?
현대 한국 관객은 그저 무겁고 어둡다고 해서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전의 흡혈귀 영화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겠죠?
송강호씨에게 송곳니를 길게 기르게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웃음)
'달은 해가 꾸는 꿈'
이젠 세계적인 감독이 되셨는데요. 이전 작품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데뷔작인 <달은 해가 꾸는 꿈> 같은 경우는 보신 분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극장에서 재상영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창피해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릴 수도 없고, (웃음)
저는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보았습니다. 인기 가수가 주연을 한 것에 가려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인기 있는 가수가 영화를 찍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조용필, 나훈아, 김흥국......
이승철씨는 연기를 잘 해 주셨지만, 그때는 영화에 있어서 배우들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몰랐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좋은 배우들을 더욱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습니다.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관객들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도 북한군에 대한 고정관념(북한군은 비열하고 나쁜 인물들이다.)에서 탈피(북한군이 도덕적인 사고와 함께 행동이 일치하고 오히려 남한군이 더 비열하다)이 할 수 있음으로 해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런 부분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감독이 의도하여 만들고 그것을 제대로 해냈다는 감독의 능력보다는 다른 외부적 요인이 흥행에 더 큰 작용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경우는 개봉을 하기 전에 615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습니다. 북한의 많은 모습들이 방송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알려졌구요, 그로 인하여 북한 사람들은 무조건 나쁘다라는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있었지요. 그런 국민적 분위기 속에서 <공동경비구역 JSA>는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항상 남북공동회담이 그 영화의 흥행성공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웃음)
반면에 <복수는 나의 것>은 유괴라는 사회악에 대한 관객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결국 관객들과 멀어지는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영화속에서 신하균과 배두나는 "유괴가 뭐가 그렇게 나쁘냐?"라고 말하며 어차피 부잣집이니 잘 데리고 있다가 돌려주면 상관없다고 합니다. 바람직한 형태의 유괴를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도 그들의 마음에는 유괴란 나쁜 것 이라는 일반적인 죄의식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이에게 잘 해주는 것도 오히려 그것 때문인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복수는 나의 것>이 관객들과 소통하지 못한 이유는 영화가 너무 냉정했던 것이 아닌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CRITERION 박찬욱 DVD COLLECTION'
요즘 어떤 생각을 하세요?
왜 내가 이렇게 보고 싶은 영화도 못보고 사나 생각이 듭니다 이번 칸느에서도 정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일정에 쫓겨 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DVD 사놓은 것도 못 보고 있고, 그래도 타의에 의해 놀아야 했던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찍을 수 있을 때 한 편이라도 더 많은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지금이 감독으로서 목표했던 큰 꿈을 이루어낸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앞으로 이루고 싶은 또 다른 꿈이 있다면?
일단 계속해서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욕심이 있다면 크라이테리언 콜렉션에서 저의 DVD를 출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사무실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크라이테리언 DVD를 직접 꺼내 보여주시며) 칸느에서 수상한 것은 단순히 그 해의 영화 중에서 가치가 있었다는 의미이니까(후세에 볼때 그 해 좋은 작품들이 없었다면 그만큼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죠) 영화 역사에 길이 남는 걸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 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크라이테리언은 그렇게 고집스럽게 발견된 영화를 최상의 환경에서 DVD로 출시하고 있는 회사지요.
편집자 주) 크라이테리언(Criterion)은 그들이 선택한 영화에 대해서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유명한 DVD 출시 회사, 그들은 원작의 관련자료의 수집이나 원본의 복원 상태, 그리고 재킷 디자인까지 모든 면에서 최상의 타이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의 타이틀이 출시되기까지 그들의 들이는 정성과 노력은 크라이테리언 콜렉션의 타이틀로 선정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영화가 영화사적인 의미나 그 장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한 것이라는 것이 반증될 정도이다.
저도 크라이테리언 박찬욱 DVD 콜렉션이 꼭 출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저도 꼭 구입하겠습니다. 가격은 많이 비싸겠죠?
크라이테리언 타이틀이 좀 비싸긴 해요. (웃음)
박찬욱 감독은 여전히 열정적이었고 친절했습니다. 최고의 순간이었던 칸느 이후, 내리막 길만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목소리 안에서도 그 자신감 있는 표정만큼은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대종상 시상식이 열리는 날,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그를 찾는 전화가 울렸습니다. 칸느는 <올드보이>를 선택했고 박찬욱 감독은 대한민국 영화의 미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대종상 시상식을 위해서 움직이는 박찬욱 감독에게 수상이라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상금이 있는 영화제에서 상 좀 받아봤으면 좋겠다."농담을 하며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유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p.s) 박찬욱 감독님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결국 대종상에서도 감독상을 수상하셨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