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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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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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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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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미셀러니] 여자,여자,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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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국민일보 칼럼
[국민일보] 1999-02-24 (문화) 칼럼.논단 29면 01판 2770자
[김훈 미셀러니] 여자,여자,여자
여자들은 아무데서나 화장을 한다.비행기 안이건 고속버스 안이건,호텔 로비에서나 사무실에서나,아무데서나 하악(下顎)을 가차없이 벌려서 벌건 입속을 드러내놓고 활줄처럼 긴장된 입술 위에 루즈를 칠한다.붓으로 루즈를 찍어서 입술의 가장자리를 먼저 그리고 루즈의 빨간 몸통을 밀어올려서 입술 위에 문지른다.그리고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오므려 안쪽으로 끌어당겨 부빈다.이것은 필시 루즈를 입술 위에 골고루 퍼지게 하려는 마무리 작업일 터인데 그렇게 짐작을 할 뿐,여자들에게 그 뜻을 물어본 적은 없었다.위 아래 입술 사이에 종이 내프킨을 물고 깨물듯 힘을 주어 입술도장을 찍어내고 종이에 찍힌 문양을 들여다보기도 하는데,그 또한 오의(奧義)를 알 수 없다.
여자들의 눈동자는 손거울이 허용하는 작은 공간 너머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 닿기 위하여,또는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 입술의 극지(極地)에 닿기 위하여 거울의 변방 구석구석을 핥듯이 정찰한다.그때 손에 쥔 거울의 각도와 고개의 각도는 눈동자가 인도하는 방향에 따라 민첩하고도 섬세한 변화를 거듭한다.눈꺼풀의 안쪽 가장자리를 따라서 검은 연필로 그늘을 그려넣는 일은 위태로워 보인다.눈을 감아야만 눈꺼풀을 고정시킬 수 있는데,눈을 떠야만 거기에 칠을 할 수 있다.눈꺼풀에 무수한 경련을 일으켜가며 여자들은 그 지난한 공사를 완성해낸다.마음의 속살이 벌거숭이로 드러나는 이 깜찍한 미학적 과정이 이제는 더 이상 은밀하지 않다.
여자들은 아무데서나 막무가내로 콤팩트를 꺼내든다.여자들의 혼백은 거울 속으로 무섭게 집중한다.그때 여자들은 마치 거울 밖 세상을 버리고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화장을 마치고 나면,딸가닥,콤팩트가 닫히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여자들은 거울 밖 세상으로 돌아온다.그러나 식당이나 카페에 혼자 앉아있는 어떤 여자들은 한바탕의 집중된 삼매경으로 화장을 마치고 나서 한동안 창 밖을 내다보다가 또다시 핸드백을 열고 콤팩트를 꺼내 그 어려운 공사를 다시 시작한다.
아마도 그 여자들의 마음이 세상과 더불어 아늑하지 못하거나,얼굴과 자아 사이에서 화해하기 어려운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남자들도 남자 노릇하기가 지겨울 때가 있다.이 세상이 상식처럼 당연하게 요구해오는 남성성을 버티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도무지 진부하고 무의미하고 또 너무 힘들어서 내팽개쳐버리고 싶을 때가 흔히 있다는 말이다.그러니 여자들인들 어찌 저 콤팩트를 내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없겠는가.다만 어쩌지 못할 뿐일 터이다.화장은 여자들의 생로병사의 일부인 모양이다.
신혼부부가 몰려드는 섬의 관광호텔 식당에는 아침마다 수십 쌍의 신랑 신부들이 마주앉는다.아침의 신부들은 풋내를 풍긴다.객실에서 내려와 막 식당으로 들어서는 신부들의 머리는 젖어있고,거기에 실핀이 꽂혀 있다.신부들은 수줍고 또 발랄하다.한 생애를 시작하는 출발의 아침에는 약간의 수줍음과 발랄함이 섞여있는 것이 마땅하리라.젖은 머리의 신부들은 그 풋내만으로도 아름답다.그러나 아침밥을 다 먹고나면 그 풋것의 아름다움은 사라진다.입가에 묻은 찌개국물을 휴지로 닦아내고 나서,수십명의 여자들이 일제히 하악을 벌리고 입술에 루즈칠을 하기 시작한다.여자들은 무섭게 집중한다.그 장관은,그것을 바라보는 초로의 사내를 몸둘 곳 없게 한다.여자들은 제 신랑을 팽개쳐놓고 거울 속 나라로 떠나간 듯하다.그러나 여자들은 떠나지 않는다.여자들의 시선은 부단히 거울을 이탈해 옆자리에서 똑같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다른 여자의 자태를 흘깃거린다.아름다움은 여자들의 얼굴 위에서,여자들의 붓 끝에서 집단적으로 사물화되고 있었다.
한국 남자들에게는 사물화된 여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말이 있다.그 말은 `잘 빠졌다'라는 말이다.`빠지다'는 `뽑다'의 자동사형이다.가래떡을 뽑다,기계에서 제품을 뽑다처럼 공업적 생산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가리키는 말이다.자동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도 “새 차를 뽑았다”라고 말한다.어디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사내들이 눈독을 들이고 힐긋거리는 여자들은 다들 잘 빠진 여자들이고,왕관을 쓴 미녀들이나 핸드폰 광고,구두 광고에 나오는 롱다리의 여자들과 수중발레,피겨스케이팅에 나오는 여자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잘 빠진 여자들이다.여자의 몸을 놓고 `잘 빠졌다'라고 말할 때,그 `빠지다'라는 동사의 쓰임새는 놀랍게도 정확하다.그 정확성은 기계적이고 공업적인 정확성이다.그리고 `잘 빠졌다'의 `잘'은 여럿이 공유하는 입맛에 맞고,공유된 욕망을 충족시킬 만하다는 뜻일 터이다.그러므로 `잘 빠졌다'라는 말의 주어는 여자가 아니라 사물이고,개체가 아니라 익명이며 규격이다.이 익명성의 규격에 따라 여자들이 사물화될 때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점점 더 도발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잘 빠진' 것이 아름다운 것이므로 여자들은 점점 더 잘 빠져나올 것이다.
남자가 남성성만으로 온전할 수 없듯이 여자들도 여성성만으로 온전할 수는 없다.남자는 남성성을 완성해야 하고 여자는 여성성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할 순 없다.그래가지고는 피곤해서 살 수 없다.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있게 마련이다.남자와 여자가 서로 그것을 긍정해주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잘 빠졌다'는 말은 공업적인 말이고,더러운 말이다.그 더러움은 사물성에서 온다.`잘 빠졌다'는 말 속에서 잘 빠진 여자는 소외된 여자다.인간과 언어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다.인간이,인간이 아닌 것으로 바뀔 때 더러움이 발생한다.아름다움의 내용을 억압과 사물성이 아니라,자유로 가득 채우는 여자가 아름답다.그런 여자가 살아있는 여자고,살아가는 여자고,삶을 영위하는 여자다.아들들아,연애를 하려거든 그런 여자하고 해라.
/김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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