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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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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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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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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딧세이] 금아 피천득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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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중앙일보에 연재되던 이헌익의 인물 오딧세이.
▶ 게 재 일 : 2000년 05월 29일 15面(10版)
[이헌익의 인물 오딧세이] 금아 피천득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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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배운 금아(琴兒)피천득 선생의 너무도 유명한 ‘수필’의 첫 소절을 내가 이 글에 쓰다니,선생의 수필집 ‘인연’이란 제목이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수필은 난(蘭)이요,학(鶴)이요,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그리고 수필은 물이 흐르 듯,청정한 마음의 붓이 가는대로 쓴다고 했다.
“베토벤”하면 흔히 ‘운명’교향곡이 떠오르 듯,이제 “노자” 그러면 그의 ‘유위적 무위(無爲)’와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생각난다.(이 ‘인연’은 김용옥에게 감사한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그러므로 도에 가깝다./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고/마음 쓸 때는 그윽하고/벗을 사귈 때는 어질고/말할 때는 믿음직하다./다스릴 때는 질서있고/일할 때는 능력있고/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탄다./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노자 제 8장)
피천득과 수필,노자를 함께 놓고 보니 비로소 수필의 참 뜻이.‘상선약수’의 제 뜻이,그리고 90세 금아 선생의 평생의 이미지가 제대로 잡혀진다.
그는 스스로를 물처럼 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글을 쓰고,음악을 듣고,영화를 보며 ‘수필’에 썼 듯이,“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으로 그 긴 세월을 오로지 한 것이다.
그가 머물고 있는 한강변 구반포의 지은지 30년이 된 저층 아파트촌의 오후는 제법 한적했고 페이브먼트의 가로수들은 이제 아파트와 키재기를 하고 있었다.
선생은 수필 ‘오월’에서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오월을 지긋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몸은 노쇠했으나 목소리는 기자가 전화로 방문을 여쭈면서 깜짝 놀랐을 만큼 또렷했다.소파조차 두지 않아 ‘깨끗한’거실의 낡은 교자상 앞에 마주 앉자 선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인생은 잠깐이야.허허.”구순의 성상 앞에서 할 말이 없다.
“요새 로비스트인가 하는 사람을 만나면 흥미를 끌텐데 나같은 늙은이는 무엇하러 찾아와요.”
-로비스트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세상을 더 어지럽히니까 선생님처럼 개결한 분의 말씀이 그리
운 법이지요.
“뭘 그래.욕심이 적어서 그런지 조용히 사는 것 뿐인데.”
-하루는 어떻게 보내십니까.
“시간으로 따지면 음악 듣는 시간이 제일 길고 그 다음 책을 보는 건데 오래 읽지는 못해요.시인들이 육성으로 녹음해 나에게 준 시들,배우들이 낭송하는 영문 녹음 시들,내가 번역한 시를 녹음한 것들을 듣기도 하고 비디오로 나온 세익스피어극을 보기도 하며 소일해요.”
-음악이나 시는 어떤 것을 많이 듣습니까.
“베토벤을 제일 좋아하고 쇼팽,브람스를 많이 들어요.시는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영국 시인 워즈워드의 것들 같은 자연시들이 좋아요.워즈워드의 “모든 광영의 길은 결국 무덤으로 뻗어져 있다” 같은 구절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고.권력을 잡든 명성이 높든 한 때를 지나면 죽음으로 가는 거고 몸이 약한 내가 90까지 사는 이 기적도 잠깐이지요.”
음악을 좋아한다며 천 단위로 음반을 모으는 사람을 보면 저 곡들을 언제 다 듣나 궁금해질 때가 많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하나만 속속들이 듣고 체화하기에도 어찌보면 인생이 짧다.음악도 국악에 팝에 재즈에 여러 갈래가 있고 음악외에도 문학,미술,연극,영화,철학 온갖 등속이 다 있으니 그것들을 언제 다 읽고 보고 스스로 생각할 것인가.인생은 참으로 짧다.
-선생님이 늘 씻어주고 이불덮어 재워준다는 난영이라는 딸은 지금도 잘 있나요.
“하하.잘 있지.우리 딸이 가지고 놀던건데,다른 사람이 보면 우스운 어린애같은 놀음이지만 내가 그런 면이 있지.해변에서 조가비나 돌멩이를 줏는 그런 마음이지.”
난영이는 서양인형이다.45년전 그가 하버드대 연구교수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없는 딸 서영이를 위해 사온 것이다.
금아의 딸 사랑은 수필집의 한 장을 ‘서영이’로 이름붙여 딸에 관한 여러 글을 모아 꾸민데서 짐작이 충분하다.“다른 사람이 없는 방안에서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는 서영이 말소리를 좋아했고”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어했던”그는 그 서영이 미국유학을 떠나자 난영이를 딸처럼 보살폈다.
낯을 씻기고,머리에 빗질을 하고,일주일에 한번씩 목욕시키고,철따라 옷을 갈아 입힌 난영이는 지금도 45년전 그 모습 그대로 금아의 침실에서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있다.
금아는 2남1녀를 뒀다.60-70년대 방송 DJ로 유명한 큰아들 세영이 캐나다에서 치과기공소를 운영하고,둘째 아들 수영은 서울중앙병원 소아과 의사로 있고,서영은 현재 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로 봉직 중이다.
-선생님의 수필 ‘장수(長壽)를 보면 아름다운 기억을 많이 가진 사람은 짧게 살았어도 행복하고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은 80을 살아도 단명하다고 했는데 아름다운 기억은 어떻게 해야 많이 가질까요.
“욕심없이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요.욕심때문에 마음이 불안하면 자연이 주는 기쁨을 알 수가 없지요.
또 파리의 개선문같은 건 나폴레옹이 다른 나라를 정복한 걸 기념해서 지었는데 그는 코르시카 섬에서 죽고 없잖아.
그런데 거기서 연애하는 젊은이들,관광하는 나그네들은 개선문을 자신의 기억 속에 담아두거든.자연의 경치든 무슨 유물이든 소유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쁘게 보고 늘 기억하는 사람의 것이 됩니다.그러니 소유란 기억으로 충분하고 그걸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하지요.”
그는 기억은 사람이 가진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고 했다.인간은 추억을 되새김질할 때 오늘을 바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보물을 어디다 뒀는지 모른는 채 평생을 살아가는 듯해 안타깝다고 했다.90이 된 지금 더욱 옛 기억이 또렸이 떠오르고 죽으면 그 기억들이 다 사라질 것이란 걸 잘 안다고 했다.
-선생님의 호 금아(琴兒)에 빗대어 선생님을 만년‘거문고 소년’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소년의 마음을 너무 일찍 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같이 다 소년같은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나.나는 소박한게 사는 게 좋았고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았으면 하는 걸 바랬고 그러니 어찌보면 뒷골목으로 다니 듯,젖은 짚단 태우는 것처럼 싱겁게 살아온 거지요.
나는 인생에서 용감성같은 게 부족해.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심은 있어야지요.다만 나도 좋고 남도 좋아지게하는 건 꼭 지켜야합니다.”
-남들이 모두 뛸 때 홀로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한 삶을 청한한 자존으로 이끌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엔 큰 것,위대한 것이 많지만 작은 것도 아름답고 소중하지요.나무나 꽃들도 다 제 삶을 살거든.바닷속에도 어류,진주,산호 별게 다 있는데 그것들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게 아니고 제 방식으로 살고 있지요.사람들도 남의 사는 방식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별건 아니지만 나는 현직 교수 시절 학생들이 데모를 하든 뭘하든 한 번도 휴강을 안했어요.직함도 선생이외에는 아무 것도 안가졌지.”
‘소년’이야기 끝에 선생은 기자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딸 서영이 사용했다던 책상 옆에 낮인지라 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 있고 작은 서가에 예이츠,워즈워드,토마스 하디,두보,도연명 시인들의 얼굴이 손바닥만한 액자에 들어 있다.
그가 지금도 좋아하는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파격적으로’ 두 장이 안치돼 있다.그리고 손주들 사진,많지 않은 책들,침대 하나 그 뿐이다.
-무소유나 청빈이란 말이 실감나고 또 부끄럽습니다.
“무소유는 무슨.내게 필요한 것이 이것 뿐이라 그렇지.”
-욕심많은 사람들에게 한말씀 해주시죠.
“내가 뭘.누구든 남에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는 게 좋겠고 나는 누가 나에게 잘못하면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살았지요.그리고 고맙게 하는 사람을 잊으면 안돼지요.
이제 나는 한 발을 무덤에 들여놓았는데 죽을 때 오래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게 제일 바램이고,화장해서 산이나 바다에 뿌려졌으면 좋겠어요.”
-여쭙기가 송구스럽니다만 왜 화장을 바라십니까.
“국토가 작은데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 살 터를 뺏으면 되겠나.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무덤이 얼마나 많아요.그보다는 훨훨 다니는 게 좋지.”
-그런 비우는 마음이 장수의 비결일 듯 싶습니다.
“소식(小食)을 해서 오래 사는 것같아.체질이 그런지 채식이 좋고.그런데 나는 타고나기를 술을 전혀 못해요.한 잔만 마셔도 의사가 달려와야 할 정도지.술 마시는 분위기는 참 좋아하는데,인생의 재미를 너무 모르고 산 것같아요.”
‘90세 소년’피천득은 일곱살 때 아버지를 잃고 열살 때 어머니마저 잃었다.그러나 재주많은 어린 피천득은 초등학교 4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현 경기고)에 들어 갔고 역시 고보 4년 때 그의 재주를 아낀 춘원 이광수의 권유로 중국 상해로 유학을 갔다.
중국 호강대에서 공부하며 그는 유학 전부터 흠모하던 도산 안창호의 극진한 가르침을 받았다.도산이 늘 그를 찾아올 정도였다.그러나 그는 도산이 일경에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돼 순국했을 때 일경의 눈이 두려워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안고 있다.
금아란 호는 거문고를 잘 타던 피천득의 어머니를 기려 춘원이 지어준 것이다.90세의 금아는 여전히 어머니를 ‘엄마’라고 표현한다.그의 시문집 ‘산호와 진주’ 맨 첫 페이지에 엄마라고 쓰고 어머니께 책을 헌정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금아의 인품을 알려면 이런 어줍잖은 기사로는 턱도 없다.그의 수필집 ‘인연’을 읽어 볼 일이다.거기엔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티없는 그의 마음이 아름다운 글로 표현돼 우리를 미소짓게 한다.
그는 젊었을 때 좋아하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특정회사의 담배를 피운다는 기사를 읽고 평소엔 담배도 피지 않으면서 그 담배를 일부러 피워본 사람이다.
[피천득 선생 약력]
▶1910년 음력4월 서울 생
▶26년 제일고보 4년 때 중국 상하이(上海) 영어학교로 유학
▶29년 상하이 호강대 예과 수학. 안창호선생에게 사사
▶31년 호강대 영문과 진학
▶33년 '신동아' 에 시 발표 등단
▶재학 중 수차 귀국, 현진건.이상범.이은상.주요한 등과 친교
▶37년 호강대 졸업
▶45년 경성대 예과 교수
▶46~74년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 교수
▶54년 하버드대에서 연구
▶69년 하버드대 등에서 강의
▶75년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수필집 '인연' , 시집 '생명' ,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역)등
▶99년 은관문화훈장, 95년 인촌상, 99년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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