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피조물들 Heavenly Creatures
평화로운 뉴질랜드의 어느 마을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파묻혀 눈에 띄지 않도록 작게 행동하지만
그녀의 고집스런 표정, 치켜뜬 눈매, 헝클어진 검은 곱슬머리는
무엇엔가 불이 붙으면 금방이라도 활활 타오를 것 같습니다.
잿더미에 덮여 있는 불씨 같다고나 할까요.
그녀의 이름은 폴린입니다.
폴린의 불씨는 곧 타오릅니다.
폴린의 불씨를 덮고 있던 잿더미를 훅-하고 불어준 것은 쥴리엣입니다.
영국에서 날아온 전학생 쥴리엣, 도도한 쥴리엣, 제멋대로인 쥴리엣,
똑똑한 쥴리엣, 상상력이 풍부한 쥴리엣, 정열적인 쥴리엣, 금발의 쥴리엣.
이 운명의 커플은 만나자마자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겨
찰카닥- 하고 들러붙고 맙니다. 그리고 곧 전류가 흐르지요.
흐르는 전류는 그들을 녹여 합체시키고, 상상과 환상과 사랑으로 가득찬
새로운 세상에 불을 밝히는 에너지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둘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우정 이상의 우정, 사랑 이상의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엉켜들어갑니다.
폴린과 쥴리엣의 광기어린 관계가 깊어갈수록 어른들의 근심도 커집니다.
부모들은 말합니다.
너 혹시 동성애자가 아니냐? 나는 네가 건강한 우정을 키우기를 바란다.
폴린과 쥴리엣은 그들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폴린의 어머니를 죽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벽돌을 넣은 스타킹을 휘둘러 어머니의 머리를 여러 차례 열심히 찍어내려
죽여버립니다.
놀라운 점은 이것이 실화라는 것입니다.
폴린과 쥴리엣은 살인에는 성공하지만 범죄에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폴린이 쥴리엣을 만난 날부터 기록한 일기가 발견되면서 둘은 살인죄로
체포, 구속됩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둘은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석방됩니다.
아주 극단적인 엔딩이긴 하지만 여학교에서 십대를 보내는 소녀들이라면
우정 이상을 나누는 단짝 친구를 만나게 되는 일이 그리 드물지만도 않습니다.
폴린과 쥴리엣이 찰흙인형을 만들어 인형놀이를 하는 부분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여자아이들은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 인형놀이에 열중하는데, 단짝 소녀친구와
자신의 인형을 각각 손에 들고 연기를 하지요. 그 연기란 대개 나의 인형과
친구의 인형이 만나고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는 내용입니다.
순화된 표현으로 '엄마 놀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것은 '연애 놀이'이며
그 연애는 둘 중 하나의 리드에 의해 때로는 '진도'가 아주 많이 나가기도 합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엿본 것들을 인형을 통해 흉내내는 은밀한 단계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지요.
폴린과 쥴리엣은 찰흙인형을 손에들고 사랑을 나누며,
쥴리엣이 폐병으로 입원해 떨어져있는 동안에는 서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부여하여 열렬한 연애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쥴리엣이 퇴원하여 둘이 다시 만난 후로는 찰흙인형도 편지도 아닌
폴린과 쥴리엣 자신으로서 사랑을 나눕니다.
이 단계에서 어른들은 이들의 '관계'를 눈치채고 이들을 떼어놓으려 하다가
이들의 사랑에 방해물이 되는 거죠. 제거해야 할 방해물.
저는 폴린이 쥴리엣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폴린에게 쥴리엣은 동경의 대상이니까요.
폴린은 쥴리엣을 닮고 싶어합니다.
쥴리엣이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 듣고, 쥴리엣이 쓰는 소설의 공동작가가 되고,
가난이라는 컴플렉스가 없는 쥴리엣의 가정에 편입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쥴리엣이 폴린에게 빠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하긴, 그 까닭을 알 수만 있다면 여학교 시절에 저를 사로잡았던 멋진 여자들을
제 친구로 만들 수 있었겠지요.
커다란 눈을 희번덕거리며 악마 같은 말투로(정통 영국식 액센트라죠?)
거침 없는 말들을 지껄이는 쥴리엣 같은 소녀가 같은 학급에 있었다면
저 역시 폴린처럼 그녀에게 빠져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케이트 윈슬렛은 찬란하게 빛납니다.
그나저나 석방된 두 소녀는 정말로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았을까요?
이 폭풍같은 사랑을 치러낸 후 그들은 어떤 어른이 되어 어떤 사랑을
경험하였을지도 무척 궁금합니다.
모처럼 진짜 잊지 못할 영화를 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후일 <반지의 제왕>을 만든 피터 잭슨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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