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극장에서 안 보고 집에서 보면 리모콘의 [||] 버튼, 그러니까
잠시멈춤 버튼에 자꾸 손이 가고, 자꾸 손이 가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잠시멈춤 버튼 지수 같은 걸 만들어 영화의 오락성을 평가할 수도 있겠다는.
어떤 영화는 버튼을 거의 안 누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천리로 보지 않을 수 없을만큼 재미있지만 어떤 영화는 툭하면 화면을 정지시키고 내 볼일을 보게 만든다. 난데없이 화장실도 가고 싶고 물도 마시고 싶고 물을 마시고 보니 물 말고 녹차나 커피가 생각나고 이렇게 마셔대니 또 화장실에 가고 싶고 갑자기 바닥의 먼지가 너무 거슬려 빗자루질을 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집에 라면이 몇 개나 남아있나 궁금해지기도 하고 내일 아침에 마실 우유는 있는지 걱정이 되고 왠지 지금 당장 사러 나가야 될 것 같기도 하고... 영~ 집중이 안 되는 거다.
최근 본 영화에 대한 느낌을 잠시멈춤 지수로 기록해보련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서너번||멈춤||
개봉 당시 각종 영화 잡지와 영화 게시판을 도배했던 이 영화에 대한 글들 - 그 물량과 그 집중도 때문에 난 이 영화가 퍽이나 보고 싶었다. 보고 나니 화가 난다. 왜 그들은 이 영화에 찍히지 않은 것들까지 보아준 것이며, 이 영화가 가닿지 못한 곳까지 대신 달려가 글을 써준 것일까.
갈데없는 홍상수 영화지만, 그간 홍상수가 만들어온 영화에 미치지 못한다.
징글징글하게 적나라하던 홍상수 영화의 인간군상이 이 영화엔 없었다.
김태우가, 유지태가, 성현아가, 그 모두가 홍상수의 캐릭터로는 미숙아였다. 안 밉고 안 징그럽고 안 추하고 안 웃기고 안 불쌍하고 안,안,안...하여 난 내가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감독도 배우도 술을 덜 먹고 찍었나..
영화가 짧았던 덕에 잠시멈춤 몇번만에 자막이 올라가 다행이었다.
<바람의 전설>||중간에 아주 오래 쉬었지||
7월초에 보기 시작해서 8월초에 다 본 영화다.
나는 춤영화에 대한 환상이 있고, 환상이 있는 곳엔 구상도 따르게 마련인지라 머릿속으로 춤영화 여러 편 찍어본 전력이 있다. 이 영화 <바람의 전설>엔 내가 구상해본,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머릿속 필름의 몇 장면과 겹치는 그림이 있다. 등대 아래서, 방파제 위에서, 산사 앞마당에서, 들판에서, 목장에서, 그런 곳들에서... 입던 옷 그냥 입은 채로 춤추는 장면들. 그런 장면에서는 되감기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다다. 춤이 이야기를 딛고 플로어 구석구석을 누비어야 할 터인데 받쳐줄 이야기가 없으니 춤마저 허한 몸짓이 된다.
주인공이 춤을 추는데, 그것도 배우가 긴 시간을 들여 배우고 익혀 제몸으로 직접 춤을 추는데, 내가 저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니. 아마도 감독은 인물을 춤추게 할 생각만 했지 그 인물이 어떤 놈인지엔 통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효자동 이발사>||정||말||자||주||멈||춤||
어린 세대를 위한 ‘그때를 아십니까’라면 모를까.
감독이 너무 착한 사람 같다. 왠지 재수없는 임상수가 준비하고 있다는 10.26의 박정희가 문득 궁금해짐과 동시에, 그냥 착한 영화보다 왠지 재수없는 영화를 차라리 나는 택하리라...로 입장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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