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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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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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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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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씨네마레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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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을 오래 앓고 있는 사람들은 길을 걷다 갑자기 통증이 엄습해오면 종종 별 관심도 없는 가게의 유리 진열장을 들여다보는 척한다지요.
또는 마음에도 없는 잡담을 시작하기도 한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들키지 않고 넘기려는 겁니다. 심장병 환자의 느닷없는 ‘윈도 쇼핑’은, 이를테면 최악의 순간에서 지켜내는 삶의 마지막 위엄 같은 것일 테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끝내 그런 위엄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사랑마저 게임으로 여기는 바람둥이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 영화 ‘스캔들’에서 정절을 지키던 숙부인(전도연)은 치밀하게 접근해온 조원(배용준)에게 마침내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다 ‘목적’을 이룬 조원이 소식을 끊자 기다리다 못해 그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숙부인은 조원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지요. “나를 믿었고, 내 말을 귀담아 들었고, 떠날 기회를 줬는데도 떠나지 않은 것”이 숙부인이 저지른 세 가지 잘못이라며 방안에 앉아 싸늘하게 내치는 조원의 말에 숙부인은 그만 마당에 주저앉고 맙니다. 그런데 하인들이 부축해 일으킨 뒤 처참한 심정으로 조원의 집을 떠나면서 숙부인은 그 와중에도 땅바닥에 떨어진 붉은 목도리를 잊지 않고 집어갑니다. 그 목도리는 바로 조원이 거짓 밀어와 함께 선물했던 사랑의 징표였지요.
영화 ‘패닉 룸’에서 멕(조디 포스터)은 남편과 이혼한 뒤 절망에 몸부림치다, 중병을 앓고 있는 딸과 단둘이 이사가 살게 된 집에서 흉악한 강도들과 마무칩니다. 가까스로 피신한 멕은 그 밤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전 남편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전화를 걸자 함께 침대에 있던 전 남편의 새 여자가 먼저 받아서 바꿔주지요. 그러자 멕은 정녕 말 한마디 붙이고 싶지 않았던 전 남편에게 “제발 와달라”고 사정합니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이별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우산을 놓치지 않으려다가 사고로 죽고 마는 인간에 비유한 적이 있었지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열여섯 살 소녀 리즐은 실연으로 괴로워하다 가정교사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누군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그러자 마리아가 답하지요. “조금 울다가 다시 해 뜨길 기다려야지.”
땅바닥에 떨어진 붉은 목도리에 눈도 돌리지 않을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요. 대문을 나서며 욕지거리라도 퍼부을 수 있다면 더욱 속시원할 테고요. 그러나 잔인한 절연의 말 앞에서도 허망한 사랑의 상징을 집어드는 바보 같은 행동은, 혹시 사랑밖에 남아 있는 게 없었던 사람의 존재 증명 같은 건 아니었을까요. 급박한 순간에 연락할 사람이 증오스런 전 남편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멕의 안쓰러운 구원요청은 곧 생명의 절규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잠시 후 다시 해 뜨길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조금만 울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는지요. 그러나 폭우처럼 퍼붓는 불행으로 온 몸이 흠뻑 젖는 상황이라면, 그 순간 우산을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요. 삶의 절박함이 마지막 위엄을 넘어설 때, 자존을 지키지 못했다고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마지막까지 그런 순간만큼은 찾아오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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