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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면서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어떤 부정적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경험적으로 미리 준비해둔다는 것이다.
우울할 땐 YTN 돌발영상을 본다거나, 전화벨이 울려도 안 받는 상태가 하루 이상 지속될 땐 내키지 않아도 학과장님께 전화해 밥을 사달라고 한다거나, 상식을 넘어서는 폭식 혹은 단식의 증세가 이틀 이상 지속될 땐 무조건 운동화를 신고 달려나가 상의가 흠뻑 젖을 때까지 몸을 괴롭힌다거나.
요며칠 사이에 마련된 또 하나의 방법은, 무기력해져 있을 때 KBS라디오 이적의 Dream on 금요일치를 다시듣기하는 것이다. 이 프로엔 금요일마다 김영하가 출연한다. 처치곤란이라는 이름의 이 코너에서 김영하는 고민상담을 해준다.
오늘 다시 들은 6월18일치 방송에 등장한 고민은 비둘기 공포증이다.
(나는 지금 살짝쿵 취한 상태라 타자가 잘 안 쳐진다. 오타가 있거든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시라.)
비둘기 공포.
사연을 보낸 A씨에겐 비둘기 공포증을 가진 친구가 있다.
전방 50m 이내에 비둘기가 나타나면 이 친구는 상당히 주목도 높은 비명을 지르며 가장 가까운 빌딩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면 A씨는 친구를 위해 비둘기를 멀리 쫓아보낸 후 떨고 있는 친구를 불러내야 한다. 그러면 친구는 A씨의 등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떨며 겨우 기어나온다. 비둘기라는 놈은 쫓아내면 다시 제자리로 오곤 하는데 그러면 이 친구는 또 죽어라 비명을 지른다.
우리의 김영하는 이 고민에 이런 대답을 해주었다.
의외로 조류 공포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남들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리고 그저 조류를 두려워한다는 표면적 현상만을 보고 말지만 당사자에게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며, 그 공포의 원인은 생각보다 깊고 근본적이다.
새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새의 특성은 어디로 날아오를지 모른다는 것이다. 새는 3차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 푸드덕하고 날아오르는 예측불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새가 나를 쫄 것이라는 공포를 동반한다.
김영하에 의하면 이런 조류 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은 어릴 때 누군가의 예측 불가능한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거나, 부모와의 관계에서 트라우마가 생긴 경우라고 한다.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어떨 땐 야단을 맞고 어떨 땐 그냥 넘어가고... 가볍게 말하자면 부모의 이런 예측 불가능한 훈육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속성들이 비둘기를 비롯한 조류에 투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조류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둘기와 친해지는 것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 공포증은 인간을 통해서만 치유가 가능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인격이 성숙되어 안정감을 갖게 된다거나, 절대적 지지자를 만났을때 많이 해결된다고 한다. 가까이 있어도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을 통해 획득해야 비둘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절대 지지자가 있고 내가 세상으로부터 쉽게 공격받지 않는다는 확신 말이다.
김영하가 비둘기 공포증에 대해 이리도 정통한 이유는 그의 아내가 바로 비둘기 공포증으로 고생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내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이 방송에 귀를 기울인 까닭은 바로 내가 아주 심각한 비둘기 공포증 환자이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만 살다가 처음 홍대 앞 주택으로 이사가 살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집 앞에 닭 한 마리가 서성대고 있어 세 시간이 넘도록 집에 못 들어가고 동네를 빙빙 돌았던 기억, 하필이면 남산 중턱에 있는 고등학교로 배치되어 아침 등교길에 비둘기를 피해 지름길을 놓아두고 먼 길로 돌아다니던 기억, 민박집 마당에 풀어놓은 닭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고 바람도 못 쐬고 방 안에aks 갇혀있던 안 낭만적이던 MT, 이따금 스트레스가 심할 때 밤새도록 닿을 듯 말 듯 비둘기가 등 뒤를 쫓아오고 나는 도망다니는 악몽을 꾸던 시절, 서울시내 도처에서 언제 어느때나 나타나는 비둘기때문에 역시나 주목도 높은 비명을 질러대 동행들을 쪽팔리게 만들었던 기억.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어릴 적 기억에서는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공격이나 부모의 훈육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찾을 수가 없다. 이런 게 명쾌하게 찾아지면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김영하의 아내는 절대적 지지자인 김영하를 만난 후 이 비둘기 공포증이 상당히 완화되었다고 한다.
절대적 지지자, 참 좋은 말이다. 그것이 말뿐이 아닐 때 그것은 얼마나 좋은 것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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