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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만 봐도 감이 팍 오는데, 이 영화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처음으로 고급 한정식집에 갔을 때 호수처럼, 들판처럼 드넓게 펼쳐진 밥상 위에
색색가지 산해진미가 쫙 깔려서 어떤 것은 팔을 뻗어도 손에 닿지 않아 안타깝고
어떤 것은 내가 맛을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나지 않아 젓가락 뻗기가 망설여지고
어떤 것은 맛있어서 한번 더 먹고 싶은데 그러자니 나의 위장 사이즈는 한정되어
있는데 펼쳐진 반찬은 다 한번씩 먹어봐야 할 것 같아서 다른 반찬으로 젓가락을
보내면서도 마음은 끌리고... 대단히 풍요롭고 맛깔스러우며, 하나라도 더 먹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의 용량 한계 때문에 눈 앞에 놓인 정찬을 포기해야 하는...
그 비슷한 느낌이 드는군요.
양식이 '시간 전개형'이라면 한식은 '공간 전개형'이라고 하죠.
이 영화도 공간 전개형입니다.
열두 폭 병풍이죠.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그렇군요.
<숏컷>도 그랬고 <패션쇼>도 그랬고...
앗, 그러고 보니 저는 알트만 감독의 영화라곤 요것밖에 본 게 없네요.
세 편 가지고 이런 식으로 잘라말하다니, 역시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아마도 제목 <고스포드 파크>가 이 영화의 주공간이 되는 저택 이름인가 봅니다.
영화 속에서 그 저택을 "고스포드 파크"라고 짚어준 기억이 없어서 자신이 없지만
전단지에 그렇게 써있습니다.
게다가 파크Park, 그러니까 '박'씨 성을 가진 로버트 파크라는 남자가 살인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요 인물로 나오고 있어 '고스포드 파크'가 혹시 뭔가 다른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봤습니다.
한 번 봐선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라더니, 정말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장시간 관람하는 관객이 이 영화를 속속들이 꿰뚫어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제 생각엔
한 번 봐선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가 아니라, 두 번 보면 한층 더 깊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네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몇 편만 읽어보았어도 이 영화의 분위기에 쉽게
젖어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택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들 모두는 곧 살해될 집주인과 각각 돈이나 애정 문제로 얽혀 있으며 그리하여
주인이 살해되자 누구라도 용의자가 될 수 있고... 뭐 이런 얘기죠.
하지만 살인사건 그 자체, 그리고 살인사건의 해결에 집중하는 영화는 아닌 듯합니다.
사건 발생 직후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형사가 바바리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등장하긴
하지만, 이 형사는 암만 봐도 사건 해결 능력이 없어보입니다.
관객들도 굳이 추리를 해보겠다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를 고민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A열6번 좌석에 느긋하게 앉아 있으면, 영화는 저절로 흘러가고 범인도 밝혀지고
살인의 동기도 알게 됩니다.
무례하게 관객의 뒤통수를 치지 않으니 관객은 얻어맞지 않아도 되고, 깜짝 놀랄
반전이나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으니 우리 관객들, 간 떨어질 일도 없죠.
게다가 살인의 순간에도 피 한방울 안 떨어지니 노약자나 임산부도 걱정 없습니다.
우아하고 귀족적인 살인이라고나 할까요.
딱 적당한 온도의 향기로운 영국 홍차를 한잔 곁들여도 좋을 살인사건이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두 부류의 인간과 두 개의 세계가 등장합니다.
저택에 모여든 귀족들이 그들의 시종꾼을 한명씩 데리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귀족과 하인 - 귀족의 세계와 하인의 세계가 형성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두 개의 세계가 두 짝으로 이루어진 한 벌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세계는 좁고 길고 복잡한 복도와 계단과 종종걸음에 의해
자주 교차되고 부딪칩니다.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촘촘히 붙어 있는 방문은 몇 번이고 열렸다 닫히고
좁은 통로로 지나다니는 그 많은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어깨를 스치는 풍경 -
종로나 인사동 같은 그 골목의 미로 시스템으로 인해 처음 온 사람은 길을 잃어
갔던 곳에 또 가고, 엉뚱한 곳에서 뜻하지 않은 좋은 느낌과 마주치고 그렇게 해서
귀족과 하인들도 분리되지 않고 촘촘히 엮여들어갑니다.
살인사건 역시 두 개의 세계와 그 두 개의 세계가 소리 없이 은밀하게 얽혀 있음으로
인해 일어나게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한 채의 저택 안에 세상의 모든 인간과 세상의 모든 관계가 담긴 듯한 느낌이
그림으로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어느 마음 편한 날 즐길 만한 영화 - 라고 추천합니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살인사건 영화지만 줄거리를 알고 봐도 김이 새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대략의 줄거리를 알고 있으면 좀더 여유있게 구석구석 관람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 1932년 11월, 맥코들 경(마이클 갬본)과 그의 부인 실비아(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사냥 파티를 위해 친척들과 친구들을 그들의 웅장한 저택 고스포드 파크로 불러들인다.
초대받은 이들은 엄청난 재산의 소유자로서 백작부인, 1차 세계대전의 영웅, 미국의 영화
제작자 등 영국, 미국의 상류층 인사들이다. 그들과 함께 그들의 수발을 드는 하인들도
같은 곳에 머물게 된다.
트렌담 백작부인(매기 스미스)의 풋내기 하녀 메리(켈리 맥도날드)는 백작부인을 수행하며
고스포드 파크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저택 안에서 얽히고
설켜가며 생활을 해야하지만, 상류층 귀족들과 하인들의 공간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상류층 귀족들이 윗 층에서 화려한 응접실 파티를 벌이고 다양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의 하녀와 하인들은 아래층 부엌과 복도에 모여서 자신의 고용주 서열에 따라 각자의
위치를 뽐낸다. 마치 일개미와도 같이 열심히 일하는 이 하인계급 사이에서도 위계질서가
존재해, 식탁에서 어느 자리에 앉는가가 정해지고 또 귀족들의 하인은 자기 이름 대신
주인의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메리는 주인들을 대신하는 각 하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너무도 얼토당토않은 허식이란 점과 윗층-아래층 세계가 충격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곧 알아낸다.
화려하게 치장한 손님들이 한가로이 티타임을 갖고 저녁을 먹고 파티를 즐기는 와중에,
한밤중에 고스포드 파크의 주인이자 파티의 주최자인 윌리엄 맥코들 경이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된다. 범인을 잡기 위해 형사들이 현장에 나타나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범인의 정체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고,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데…
… (씨네21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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