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겐 <취화선>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이 영화가 올해 칸느에서 수상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것이다.
소식의 출처는 문화관광위원회와 관련이 있는 어느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다.
그 즈음 이 영화는 아직 촬영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작년말 혹은 올해 초의 일이다.
그 수상 예고는 88 올림픽을 전후하여 몇몇 세계 미인대회와 해외영화제에서 우리나라가
난데없이 큰상을 수상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정말로 임권택이 감독상을 수상했다.
Daum초기화면의 뉴스섹션에서 칸느 감독상 수상 텍스트를 발견한 그날 나는 대단히 허탈했고
어쩐지 무기력해지기까지 했다. 작은 책상 한 칸에 앉아 앞날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 박혜림은 <취화선>이 싫어졌다. 나의 책상 한 칸과 나 자신을
싫어하는 것보다는 아직 보지 않은 영화 <취화선>을 미워하는 것이 속편했다.
그래, 세상은 짜고 치는 고스톱인 게야. 칸느고 서울이고 다 그렇고 그런 것이지...
<취화선>에서 스크린은 화선지를 닮았다. 그 화선지는 낱장으로 제각각 단절되어 있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공간이 되지도 않고, 인물들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지도 않는다.
삶과 길을 따라 시간이 면면히 흘러가지도 않는다. 약한 지질의 그림 한장 한장이
커다랗고 묵직한 한권의 화첩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스크린은 한장짜리 그림을
손으로 넘기듯 지나간다. 한 장을 넘기면 새로운 그림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지나간 장은 이미 지나간 장일 뿐이다. 물론 그 사이엔 단절감이 있고 아쉬움이 있다.
어쩌면 뜻밖의 냉정함과 단조로움에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그것은 달리 말해
역사책의 연표와도 같다. 너무 많은 사연이 행간을 꽉 채우고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훑어보기 위해서는 그 행간을 잠시 무시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복잡한 시대에
천재를 꽃피우며 살아간 큰화가의 삶을 21세기의 관객 앞에 그려내는 시작으로서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낱장의 그림과 감정 없는 연표에 익숙해질 즈음부터 영화 속 시간은 하나로 이어져
흐르기 시작하고 인물들은 그제서야 감정을 내지르며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당연하게도 장승업이 어느 사대부로부터 배운 것 없는 천민의 그림은
천한 재주일 뿐이라는 모욕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이전까지 장승업은
한 장 그림 속 거지소년, 한 장 그림 속 손재주 좋은 머슴, 한 장 그림 속 피어나는 청년으로
조각나 있었다. 그가 만난 여자들도 낱장의 초상화로 기억의 단편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었으나 이 대목부터 등장하는 김여진은 기세좋고 말 많고 성질이 드세다.
영화 중반을 매듭으로 하여 달라지는 이 전개방식은 세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에
복잡한 시대와 사연 많은 인물을 담아내는 임권택의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좀더
비약하자면 서편제 이후 한국적 정취를 고집해온 그가 필름이라는 서구 매체에
자신의 터치를 새기는 그만의 방식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칸느 영화제 수상이 국제적인 로비의 결과이든 아니든 나는 이 영화에 길고 긴
박수를 보냈다. <서편제> 이후 계속된 그 정서의 "정치적으로 옳바름 여부"에 대한
논쟁과는 별개로 영상 작가로서의 성취에 존경심을 갖게 된다.
이제 임권택의 영화는 여타의 영화들과 다른 "차이"가 있음을, 내 몇 편 안 되는
임권택 감상의 꼭대기에 <취화선>을 얹어놓음으로써 인정하게 되었다.
- 배우에 대하여
안성기는 정말 좋은 배우인 것 같다. 연기에 대해 평가할 안목은 없지만
<영원한 제국> <무사>에 이어 사극에서 만나는 그의 안정감은 대단한 빛을 발한다.
언젠가 동훈은 <칼의 노래>를 영화로 만든다면 이순신은 안성기 -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취화선>의 안성기를 보는 동안 머릿속에 최고의 사극, 최고의 주연으로
형상화된 <칼의 노래>라는 환상을 그리게 된다.
물론 그것은 최고의 한국적 마초영화가 될 것이고 말이다.
- 참한 여성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맥아리 없음이 곧 참함은 아닐진대, 손예진과 유호정은 단정하고 정갈한 여성을
그려내는 데 한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비중있게 제대로 그려진 양가집 규수를 만난 기억이 없다. 문학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너무 심심해서일까 너무 어려워서일까. <토지>를 한번 읽어봐야겠다.
|
|
|
|
| |
늦바람 |
안성기...네, 특히 사극에서 그 존재감이 한층 두드러지지요. 요즘...저도 '칼의 노래' 읽으면서 언뜻 떠올리기는 했는데요..참 그런데, 혜림씨는 감독은 누가 좋을 것 같은지 생각해 봤나요? 전 엉뚱하게도, 홍상수 생각이 나더군요. 본인이 맘만 먹는다면 꽤 살벌하게 그려내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안성기의 연기는 좋았는데, 대사처리는 좀 문제가 있어 보이더군요. 대체 대사가 입에 착 달라붙지를 않아 보였는걸요. 그게 다 그 놈의 시나리오 때문이기는 했겠지만, 특히 무슨 대사였더라, 장승업하고 시장통에 나란히 서서 하는 대사하고, 마지막 독대하는 장면-목침을 베고 비스듬히 누운 장면...진경, 선경 이야기하면서 장승업과 맞서는-에서는 유난히 귀에 거슬리던데요. 시나리오도 문제지만, 임감독이 대사처리에 좀 둔감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착 달라붙지 않으면 대사를 손질하든가, 아니면
배우가 편하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두고 준비를 시켜야 할텐데, 별 생각없이 진행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손예진같은 경우는 더 심하지만요.
전, 그다지 좋은 느낌으로 보지 못했답니다. 특히 최민식의 경우, 정말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어요.
보통 좋은 영화는 감독이 배우를 아낀게 드러나는 법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거든요.
최민식씨 연기가 좀 딱해 보였어요. 아마 다시는
그런 식으로 영화하지 않겠다고 맘먹지 않았을까 싶던데요. |
2002/06/04 |
x |
|
|
| |
박혜림 |
저는 안성기를 보면서 "아!" 했던 대목이요, 동학운동 일어난 뒤 최민식이 길을 걷다가 바닷가 갯벌에서 안성기를 발견하잖아요.
다 늙은 안성기가 최민식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툭 치고 웃는데, 그 웃음이.. 정말 멋지고 훌륭한 노인들이 천진하게 웃는 그 웃음인 거예요.
취화선은 스타일에 들어간 지극정성이 마음을 많이 움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밖의 다른 지점에서 아쉬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죠.
임권택 감독이 연기 지도를 잘하는 감독으로 알고 있는데 (장군의 아들을 보세요. 온통 신인들을 데려다가 영화를 찍었고, 게다가 신인 발굴하는 안목도 대단해서 장군의 아들 출연진 전원과 춘향전의 조승우 등등.. 임권택의 영화에서 태어나 훌륭하게 자란 배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선 배우들이 마치 소도구만큼이나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느낌, 저도 받았습니다.
배우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아요. 그림, 풍경, 계절, 시대... 이런 것들이 주인공인 영화라고나 할까요. |
2002/06/05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