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의무도 없는 연휴, 자유의 바다 위에 배영 자세로 드러누워 시간을 따라 흘러다녔다.
나의 앞날도 그러하다. 오라는 데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다. 약속이 없는 일요일같은 나날이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지만 그럴 의욕이 샘솟지 않을 땐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약속이 있다면 최소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라도 어떻게든 해내겠지만 말이다.
오래 전 메신저에서 민조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모자를 쓰고 싶다고 했다. (기억하는가, 친구?)
마법학교에 입학한 학생들 머리에 순서대로 씌워지는 그 모자가 이 녀석은 1번 기숙사, 이 녀석은 2번 기숙사... 이렇게 결정을 내려준다. 난 해리포터를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어느 기숙사로 가느냐는 마법학교 학생들에게 꽤나 중요한 결정사항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로 그 모자는 학교 안에서의 운명을 결정하는 모자다.
그때 민조는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던 나는 오죽하면 그 말을 여태 기억하고 있을까. 정말이지 어떤 땐 운명이 시키는대로 하고 싶다. 엄마가 시키는대로, 담임이 시키는대로가 아니라 운명이 시키는대로라면, 안 개기고 따르지 않겠는가. 운명이라는데...
우리가 가끔 사주를 보고 타로점을 보고 토정비결을 보는 이유는 시키는대로 해야 할 것만 같은 운명을 그렇게라도 파내보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 전문요원으로 까메룬에 파견되어 윈도우나 깔았다 지웠다 하고 있는 카이스트 출신의 설군이 오늘 그랬다.
누군가의 꿈이 정말 내 꿈보다 가치 있어서 내가 그 꿈을 밀어줄 수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 내 꿈을 정말 확실히 서포트해줄 수 있는 배경이 있거나 하면, 팔려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내가 누군가의 가치 있는 꿈을 확실히 밀어줄 수 있다면 그 누군가의 언년이로 이 한몸 바치는 것은 가장 쉽게 가치 실현에 동참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 나를 사주겠다고, 더구나 나를 사고도 남는 힘으로 나를 내가 원하는 나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면 이 거추장스런 영혼을 선물포장하여 DHL로 집앞까지 배달해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자유의 바다 위에 너무 오래 누워 있으면 가끔 파도가 얼굴을 덮쳐 물을 먹는다.
그만 뒤집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려야겠다.
운이 좋으면 모자를 찾을지도 모르고 고객을 만날지도 모른다. 아님 그냥 가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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