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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나리오를 읽다
역시 이창동은 소설가다. 그것도 꽤 괜찮은 소설가.
영화를 하는 남자친구 덕분에 화제가 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많이 얻어다 읽었지만 <오아시스>처럼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만으로 완결된 감상과 완성된 이미지를 품게 하는 시나리오는 없었다.
그것은 여타의 시나리오들이 함량 미달이라서가 아니라 시나리오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임을 나는 알고 있다.
<오아시스>의 시나리오는 한 편의 문학작품이었다. 그 익숙함이라니..!
2. 극장에 가다
문제는 바로 그 시나리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사실에서 스크린으로, 스크린에서 나의 두 눈으로 투영된 시간의 그림, 그림의 시간은 내 안에 이미 완전한 작품으로 들어앉은 <오아시스>를 허물어뜨리는 시간과 그림이었다.
그리고 또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무엇인가가 나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그 무엇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나는 일단 박수를 쳤다.
그것은 전적으로 설경구와 문소리의 연기 때문이었다.
3. 그후로 며칠 동안
나에게 시나리오를 넘겨주며 남자친구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창동은 아주 착한 사람이거나 (국제)영화제에 환장한 사람일 거라고.
나는 내 머릿 속에서 좋은 소설가였다가 좋은 영화감독이 된 작가로 자리잡힌 이창동이 그렇게 폄하되는 것이 불편해서 일단 화를 내고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오아시스>를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나는 동안 나의 불편함과 불안함은 '국제 영화제용 착한 영화'라는 혐의로 마음이 쏠렸다.
씨네21이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엄지손가락을 불러모아 빳빳이 치켜들고는 리얼리즘이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진정성이 어떻고 찬사를 퍼부어댔지만 나는 리얼리즘과 사랑과 진정성을 가장한 어떤 작위성과 오만함을 본 듯하다.
설경구는 <오아시스>의 시나리오에 대해 "야비한 지문"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시나리오가 이 뛰어난 배우에게 야비한 지문이었던 까닭은 다만 그 지문이 배우에게 너무 어려운 연기를 요구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으로, 혹은 연필로 원고지를 메우는 것으로 완성한 <오아시스>, 만약 리얼리즘과 진정성과 사랑이 있다면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거기에 돈과 사람을 들여 극장으로 가기까지, 그리고 아마도 극장에서 붉은 카펫으로 가기 위해
진정성과 리얼리즘은 무엇인가로 변질되었다.
나는 마치 신춘문예 공략용 단편소설을 능숙하게 뽑아낸 어느 문학청년이 문학판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영화판에서 써먹어본 듯하다고까지 느꼈다.
이젠 신춘문예니 문학상이니 하는 것들에 시큰둥한 것처럼 나는 당연하게도 이런 영화에 시큰둥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오아시스>가 싫다.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많은 작품이 나오면 일단 좋은 점만을 칭찬하는 것이 한국영화를 사랑하고 키우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2002년 여름은 이미 그런 시절은 아니어도 될 것 같다.
이젠 좀 많이 보고 많이 배운 제대로 된 비평가가 제대로 된 작품 비평을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말로 표현해낼 수도, 제대로 짚어낼 수도 없지만, 나의 어설픈 촉수는 <오아시스>가 영화적으로도 헛점 투성이일 것임을 직감한다. 조명이니 촬영이니 뭐니 뭐니 하는 기법적인 면에서도 말이다. 장면이 바뀔 때, 카메라가 느닷없이 눈높이를 조절할 때 나는 여기저기서 조금씩 덜거덕거리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은 듯하다.
기법적인 완성도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그것이 어설플 때에만 눈에 들어온다. 마치 책의 편집처럼 잘된 것은 눈에 띄지 않고 그냥 흘러가지만 오자나 탈자는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젠 이런 얘기까지 해주는 영화비평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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