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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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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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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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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놀이의 즐거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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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소개부터 하자면,
아래 우리집 소파에 앉아 있는 형광빛 도는 저 녀석의 이름은 "고얀"이다.
나는 오늘 고얀과 함께 집에 있었다.
코카콜라 라이트 제로칼로리 레몬맛을 마셨고,
냉장고를 수도 없이 열었다 닫았다 하며 이것저것 꺼내먹었다.
물론 잊지 않고 설거지도 했다. (나는 설거지거리를 쌓아두는 것이 싫다)
아마도 밤이 되면 소주를 한잔 마실까 말까 망설이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인형놀이를 시작하게 된 것은 김영하 덕분이다.
김영하 역시 누군가의 덕분에 이 인형놀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인형은 도널드덕이다)
김영하의 글을 베낀다.
* * *
도널드덕
얼마 전 또 사고를 쳤다. 디지털 카메라를 덜컥 사고야 만 것이다(차분히 둘러보면 우리 집엔 '덜컥' 산 물건들 투성이다). 사고 보니 디지털 카메라는 그야말로 어른을 위한 신나는 장난감이었다. 찍었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지우고 그리고 나서 또 찍고, 다 찍고 나서는 그걸 컴퓨터에 저장한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도 찍고 동네 강아지도 찍고 일 때문에 만난 출판사 직원도 찍는다. 필름값이 들지 않는다는 걸 믿고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며 별 대단치도 않은 것들을 찍어대는 것이다. 심지어 아파트 경비실 옆에 붙은 쓰레기재활용 안내문이나 종합소득세 납부요령도 찍어가지고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좀 시들해진다. 처음엔 신기해 하며 관심을 가져주던 아내도 시큰둥해한다. 동네 풍경과 아는 사람들을 다 찍고 나니 더 이상 찍을 게 없었다. 어쩐다? 그때 번쩍, 즐거운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아내와 함께 코엑스로 출동했다.
예전에 가르친 학생 중에 좀 희한한 녀석이 있었다. 미국에서 온 학생이었는데 종강하던 날 내게 다가와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기념 삼아 선생과 한 방 찍는 거야 흔한 일이었으니 나는 흔쾌히 동의하고 포즈를 취했다. 그렇지만 녀석은 내 곁에 오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곰인형을 하나 꺼내 내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녀석의 곰인형과 함께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녀석은 자기 앨범을 보여주었다. 사진마다 그 곰인형이 들어 있었다. 그 곰은 경복궁 해태 머리 위에도 있었고 우리 어학당 정문 앞에도 있었고 김포공항 입국장에도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여행을 하고 있는 건 녀석이 아니라 곰인형인 것만 같았다. 녀석은 그 곰을 함께 공부한 친구들에게 일일이 들려 다시 사진을 찍었다. 오호, 재미있는 걸.
세월이 흘러 나는 그 기발한 발상이 녀석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Willy Puchner 같은 사진작가는 1.5미터짜리 펭귄들을 데리고 세계를 여행했다. 펭귄 인형들은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앞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만년설을 이고 있는 험준한 봉우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그런 장난을 통해 풍경사진 혹은 여행사진의 고정된 관념을 흔드는 것. 아마 그게 그 발랄한 사진가의 의도일 것이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채셨을 것이다. 느닷없이 나와 내 아내가 코엑스몰로 출동한 이유는 별 게 아니라 군소리없이 내 사진의 모델이 되어줄 인형을 사기 위해서였다. 연인과 아이들이 몰리는 곳답게 인형 가게는 많았다. 우리는 참을성 있게 윌리의 펭귄을 대신할 우리의 인형을 골랐다. 푸우와 토토로, 마시마로와 미키마우스가 우리의 간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즉석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다. 음, 약간 표정이 어두운데? 아무래도 그렇지? 이 푸우는 입고 있는 스웨터는 예쁜데 카메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엔 너무 크군. 까다로운 품평 끝에 입양된 인형은 다름 아닌 도널드덕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큰 눈, 뭔가를 열심히 말하려는 입. 당신의 페르소나로는 딱이네. 아내는 내 입과 도널드의 입을 번갈아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만 원을 내고 도널드덕을 데리고 인형 가게를 나왔다.
어쨌든 그때부터 도널드덕의 모델 생활이 시작되었다. 도널드는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공사장을 시찰하기도 하고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떡하니 타기도 했다. 물론 촬영에 어려움이 없을 수 없었다. 2호선 지하철 의자 위에 도널드를 앉혀놓고 건너편에서 그걸 찍고 있노라면 정신병자 대하듯 쳐다보는 승객들이 많았다(왜 없었겠는가?). 그들은 옆자리에 앉은 도널드덕을 불편해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도널드덕이 낯을 전혀 가리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모델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도널드덕의 사진이 하드디스크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아마 곧 떠날 여행에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전시회를 하거나 사진집으로 낼 건가요? 내 도널드덕을 안고 얼떨결에 모델이 되어버린 동료작가가 물었다. 아뇨. 그건 무의미해요. 에술의 세계에서 2등이란 곧 꼴등이잖아요. 나는 대답했다. 동료작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도 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인형과 노는 일의 그 순수한 즐거움, 퇴행의 쾌감을.
* * *
나는 코엑스까지 인형을 사러 나갈 기분이 아니었고, 또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보니 인형이 열 개도 넘었다.
어떤 녀석은 무척 이쁘지만 덩치가 너무 컸고 또 어떤 녀석은 너무 작았다.
카메라테스트를 해보니 평범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는 녀석들은 적합하지 않았다. 사물들 속에 묻혀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발적인 색조를 자랑하는 저 녀석을 간택했다.
고양이를 갖게 되면 붙여주려고 진작에 지어놓은 이름 "고얀"은 그리하여 이 녀석 차지가 되었다.
"얀"은 가슴에 붙어 있는 빨간 하트를 누르면 멜로디를 들려준다. 그 멜로디에는 아마도 '우리 사는 이 세상 아주 작고 작은 곳...' 어쩌구 하는 가사가 붙어 있을 것이다.
"얀"은 지난 여름 내 손에 입양되었고 나에게로 오기 전까지는 남산 꼭대기에 살고 있었다.
아마도 "얀"은 나와 함께 오래도록 이 놀이를 계속하거나,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 버려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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